[김종두칼럼]숫자(1-효)로 본 정약용 선생의 가치 지향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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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두칼럼]숫자(1-효)로 본 정약용 선생의 가치 지향적 삶

김종두                        다산문화교육원 상임이사                                 ??????전 국방대학교 교수
김종두
정약용문화교육상임이사 ?????
전 국방대학교 교수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의 가치 지향적 삶은 ‘유시시구(唯是是求)’의 ‘목민정신’과 ‘수기안인(修己安人)’의 ‘목민리더십’으로 귀결된다. ‘유시시구’는 “공정한 마음으로 듣고 보아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오직 옳고 옳은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상례사전』 서문에, ‘수기안인’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내용으로 『자찬묘지명』에 나온다. 그리고 선생의 학문은 효제자(孝弟慈)가 중심인 「오교(五敎)」에 기초하고 있는데, ‘효제자’는 곧 ‘효’로 압축된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선생의 가치 지향적 삶을 ‘숫자1(효)’에 초점을 맞추어 알아본다.


효는 본디 좁게는 ‘가족사랑’과 ‘가정윤리’를 뜻하지만, 넓게는 ‘세대공감’을 의미한다. 그리고 효(孝, HYO)는 효도(孝道, filial piety)와 구별되며, 영문으로도 태권도(taekwondo)와 김치(kimchi)처럼 효(HYO)로 표기한다. 그러니 효는 ‘자녀(Y)와 부모(O)의 하모니(H)’, ‘젊은 세대(Y)와 노년세대(O)의 하모니(H)’로 ‘Harmony of the Young & Old’의 약자이다. 따라서 효는 상호적이면서 쌍방향적인 반면, ‘효도’는 ‘자녀가 부모를 섬기는 것’이니 수직적면서 일방향적이다. 선생도 『맹자요의』에서 “자식에게 바라는 대로 부모를 섬겨야 한다(所求乎子以事父).”면서 효를 상호적으로 보았다.


선생은 자식에게 보낸 편지에서 “학문의 근본은 효제자(孝弟慈)에 있는데, 이를 줄이면 효제(孝弟)이고, 더 줄이면 효(孝)이다. ‘효제자’에서 ‘자(慈)’는 새나 짐승도 자식을 사랑할 줄 알기 때문에 제외할 수 있고, ‘효제’에서 ‘제(弟)’는 효를 하면 제(弟)는 저절로 되므로 제외할 수 있다. 증자(曾子)가 『효경』 제목을 ‘효제경’이 아닌 ‘효경’으로 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仁)의 근본은 효(孝)다.”라는 표현에서 효의 확대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효에 대한 생각을 피력한 선생의 대표적인 글은 곡산부사시절에 작성한 「유곡산향교권효문(諭谷山鄕校勸孝文)」이다. 이 글에서 선생은 “허벅지 살을 베어서 부모에게 요리해드린 일이나, 부모의 똥 맛을 보아 약을 지어드린 일, 그리고 병들어 죽은 남편을 따라 죽은 아내를 ‘열녀’라 칭하고 ‘정려문’을 세운 일, 호랑이가 등에 타라고 땅을 긁는 일, 얼음 속에서 잉어가 튀어 나오고 겨울에 죽순이 솟아나는 일 등의 신령함으로 효를 표현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라면서 잘못 인식된 효를 지적한바 있고,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중용자잠』, 『대학공의』, 『심경밀험』, 『목민심서』 등에서 효를 밝히고 있다.


선생은 효를 모든 학문의 기초로 보았는데, 여기에는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30~1792)공의 영향이 컸음이 『압해정씨가승(押海丁氏家乘)』에 기록돼 있다. 재원공의 효는 진사시험 면접에서 영조와의 문답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대가 작성한 답안에서 ‘의(義)’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영조가 묻자 “숙연(肅然)과 용성(容聲)입니다.”라고 답했고, “그게 무슨 뜻인가?”를 묻자 “숙연(肅然)은 ‘제사(祭祀)에서 조심하며 삼간다.’는 뜻이고, 용성(容聲)은 ‘제사 때 조상의 얼굴을 뵐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라고 답하자, “그렇다면 누구나 그리 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고, “효자라야만 조상 얼굴을 뵐 수 있고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영조는 잠시 눈을 감고 묵상에 잠겼다가 “옳도다. 훌륭한 대답이다.”라고 칭찬했는데, 영조는 마침 이때가 아버지(숙종) 제사를 앞두고 있던 터여서 아버지를 상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인데, 여기서 재원공의 효심과 인품을 발견할 수 있다.


선생의 효행은 아홉 살 때 모친을 여의고 큰 형수(약현의 처)와 서모 잠성 김씨의 도움으로 성장할 당시의 효성이 ‘잠성김씨 묘지명’에 기록돼 있고, 31살 때 아버지 재원공이 임지에서 별세하자 약현, 약전 형과 함께 3형제가 여막살이할 때의 모습을 담아 기록한 「망하루기」, 「수오재기」, 「매심재기」 등에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선생의 이러한 효는 500여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로 다산학(茶山學)을 탄생시켰고, ‘유시시구’의 목민정신과 ‘수기안인’의 목민리더십으로 승화시켰으며, 오늘날 세계적 인물이자 만인의 스승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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