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두 다산문화교육원 상임이사 전 국방대학교 교수

공자(孔子)는 “알아야 면장(免墻)한다.”고 했다. 즉 “알고 임하지 않으면 장차 마주하는 어려움을 면키 어렵다.”는 내용을 아들[鯉]에게 일러 준 말이다. 제자들에게는 ‘지호락(知好樂)’을 강조했다. 즉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기만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는 뜻이다. 이 표현을 정약용 선생 정신현양 사업에 대입하면, 선생을 바로 알지 않고서는 선생을 좋아하기도 어렵고, 선생의 정신현양사업에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기도 어렵다는 말이 된다. ‘정약용 선생 바로알기’ 연재칼럼도 이런 의미에서 시작했고, 그런 마음으로 마치려 한다.

필자는 지난주에 정약용문화교육원 임원 및 회원들과 함께 1박2일 동안 ‘정약용선생과 함께 떠나는 실학기행’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선생께서 정확히 16년 9개월 9일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전남 강진의 유적을 견학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이번이 개인적으로는 다섯 번째 강진 기행(紀行)이었지만, 선생의 발자취를 보게 될 때마다 예전 방문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선생께서 유배될 당시 강진현감은 노론벽파(老論僻派)의 핵심인물이자 서용보의 부하였던 이안묵(李安默, 1756~1804)이다. 선생이 유배지에 도착한 1801년 11월 23일보다 4개월 전(7월 22일)에 부임해서 이기경, 목만중 등과 함께 선생의 죄목을 만들어내는 일에 혈안이 되었던 인물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엄동설한(嚴冬雪寒)임에도 선생께서 머물 거처를 내줄 지역민은 있을 수 없었다.

이를 딱하게 여긴 동문매반가 주모(酒母)의 선의가 아니었으면 동사(凍死)할 뻔 했던 선생이 주모의 도움으로 거처를 얻게 되자 당호를 ‘사의재(四宜齋)’라 정하고 ‘생각을 바르게[思]’, ‘용모를 바르게[貌]’, ‘말을 바르게[言]’, ‘행동을 바르게[動]’라는 4가지 가치들을 마땅히 지키는 가치 지향적 삶을 통해 죄목(罪目)을 피해갔을 뿐 아니라 500여권의 저술을 남기는 삶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산학(茶山學)을 탄생시켰고,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남게 되었다. 이 위대한 업적의 시작이 ‘사의재’였음에서, 그분[주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행을 했다. 그리고 ‘다산박물관’, ‘다산초당’, ‘고성사’, ‘대흥사/일지암’, ‘녹우당’과 ‘명발당’, ‘전라병영’, ‘백운동 별서지’ 등을 견학하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토록 선생을 괴롭혔던 이안묵은 강진현감 임무수행 중 탐욕의 비리들이 적발되자 1804년, 노론세력에게도 외면당한 채 49세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선생은 폐족을 당하고 유배형에 처해진 처참한 신세로, 언제 사약(賜藥)이 내려올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었지만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옳고 옳은 것만을 추구한다.”는 ‘유시시구(唯是是求)’와 “지도자[목민관]는 자신의 몸을 먼저 수양하고 나서 백성을 편안케 해야 한다.”는 ‘수기안인(修己安人)’의 목민(牧民)정신을 바탕으로 “오래되고 낡은 나라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신아구방(新我舊邦)’을 제안했던 나라사랑 정신을 알아야 한다.

소크라테스와 퇴계 이황(李滉) 등은 ‘지행일치(知行一致)’를 강조했다. 그러나 ‘아는 것[知]’이 ‘행함[行]’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느낌[情]’과 ‘다짐[意]’의 중간 과정이 들어가야 한다. 즉 ‘知(앎)→情(느낌)→意(다짐)→行(행동)’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우리는 정약용 선생의 삶과 생애를 스토리텔링화해서 남양주 유적지에 찾아오는 방문객에게 알려주어서 느낌을 받게 하고, 다짐하여 실천케 해야 한다. 그러자면 현재 ‘여유당’과 ‘묘소’만 있는 현 유적지를, 선생의 생애를 담은 유적들로 보강해야 하는데, 이를테면 임청정(臨淸亭), 망하루(望荷樓), 수오재(守吾齋), 매심재(每心齋), 채화정(菜花亭), 태실(胎室), 초천(苕川) 등을 복원하고, 선생의 큰형 약현(若鉉) 공의 묘소를 정비하여 스토리텔링화해야 하는 것이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之也)”라고 했고, 노자(老子)는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는 위이지만,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것은 병이다(知不知上 不知知 病).”라고 하여 ‘바른 앎[知]’을 강조했다. 이에 비춰보면, ‘다산(茶山)’은 선생의 20여 개가 넘는 아호(雅號) 중 대표적 아호이긴 하지만,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에 있는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유래한 지명(地名)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남양주유적지의 정체성을 감안할 때, 현재 사용되고 있는 ‘다산기념관’, ‘다산문화관’, ‘다산로’, ‘다산문화의 거리’ 등의 명칭 사용은 재고(再考)되어야 한다. 『자찬묘지명』에 자신의 아호를 ‘사암(俟菴)’이라 밝히신 선생의 마음도 헤아려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민심서』 서문에 “1821년 열수 정약용이 서(序)한다.”고 했으니, 『목민심서』 발간 200주년도 2018년이 아니라 2021년이다. 이런 것들이 실사구시(實事求是)적으로 행해질 때 ‘남양주가 낳은 세계적 인물’이라는 선생의 칭호에 걸 맞는 사업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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